선인들의 재미있는 봄나들이 이야기

From:골든브릿지Author: 2023-04-07 14:39

 봄나들이는‘답청(踏青)’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탐춘(探春)’,‘구춘(尋春)’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3월의 따뜻한 봄날, 청명절에 즈음하여 친구를 만나 교외에서 봄 경치를 구경하고, 연을 날리고 그네를 타거나, 혹은 산과 들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꽃놀이를 하는 것이 선인들의 가장 쾌적한 여가 방법이다.

 봄나들이에도 정해진 명절이 있다

 선인들의 봄나들이라고 하면 현재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에서 묘사된 그때일 것이다.“영화(永和) 9년 계축(癸醜)년 음력 3월 상순에 우리들은 회계군(會稽郡) 산음성(山陰城)의 난정(蘭亭)에 모였는데, 이는 수계(修禊)를 행하기 위해서다.” 300여 글자로 한편의 대작이 거침없이 쓰여 후손들이 그 날의 산수의 아름다움과 향연의 즐거움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이 중 수계는 음력 3월의 첫 번째 사일에 행한 제사로, 물가에서 제례를 올리고 묵은 때를 씻으며 재해를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는 바로 옛날의‘상사절(上巳節)’이다.

 춘추(春秋)시대 상사절이 이미 유행했다. <논어(論語)>에서“늦은 봄날에 어른 대여섯 명, 아이들 예닐곱 명을 초대해 함께 기수[沂水, 산둥(山東)성에서 발원하여 장쑤(江蘇)성으로 흘러 들어감]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태(舞雩臺)에 가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록이 있다.

 위진(魏晉)시기에 이르러 자연을 숭상하고 산수를 마음껏 즐기는 풍습으로 상사절의 제사적 요소가 점차 사라지고 문인과 학자들이 봄맞이 여행을 하고 물을 끼고 연회를 베풀어 즐기는 축제로 변모했으며 상사절도 3월 3일로 정해졌다.

 당(唐)나라 때 상사절은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당나라 천보(天寶) 연간의 화가 장훤(張萱)은 <괵국부인유춘도(虢國夫人遊春圖)>를 통해 당시 귀족들의 상사절 봄나들이 장면을 묘사하여 봄날의 화창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와 함께 청명절의 기능도 달라졌고, 사람들은 성묘와 함께 봄놀이도 갔다. 송(宋)나라 이후 상사절은 점차 몰락하여 청명절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봄나들이를 보조로 하는 명절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인들의 다양한 답청

 봄나들이는 꽃구경, 등산, 정서 함양을 할 수 있지만 더 재미있는 놀이도 빼놓을 수 없다. 연날리기, 투화(鬥花, 기이한 꽃을 누가 많이 머리에 꽂았는가로 승자를 결정하는 놀이), 투초(鬥草), 축국, 그네뛰기 등은 모두 선인들이 좋아하는 봄나들이 놀이였다.

 늦봄에는 날씨가 맑고 공기가 상쾌하여 연을 날리기에 딱 좋은 시기이며 민간에서도‘청명절에는 새미를 날리다(清明放斷鷂)’는 속담이 있는데 여기의‘새미’는 곧 연이다. 선인들은 재앙과 질병을 연에 적었으며, 연이 높아지면 실을 잘라서‘연을 끊어 상문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투화는 이해하기 쉽다. 누가 기화가 훨씬 많은지 겨루는 놀이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는 “장안(長安) 사녀(士女)들은 봄에 투화를 하는데 기화를 많이 꽂은 사람이 이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투(文鬥)’와 ‘무투(武鬥)’로 나뉘는 투초는 좀 더 복잡하다. ‘문투’전에 선인들은 화초를 많이 따다가 함께 모여 ‘화초 이름을 알리는’ 방식으로 대결했는데, ‘문채(文采, 문학적 재능)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 우승을 한다. ‘무투’는 풀의 질김을 겨루는 것으로, 쌍방이 서로 각자 질긴 풀을 골라 그것을 서로 교차하여 힘껏 잡아당겨 끊기지 않는 자가 승리하는 게임이다.

 축국과 그네뛰기도 선인들이 특히 좋아했던 봄나들이 놀이이다. 두보(杜甫)의 <청명(清明)>시에“십년축국장추원, 만리추천풍속동(十年蹴鞠將雛遠,萬裏秋千風俗同, 10년 동안 나는 자녀들을 데리고 하루하루 멀리 떠돌아 다녔지만, 청명절에 타향 곳곳에서 축국을 하고 그네를 타며 놀았는데, 그 풍습은 고향과 같았네)”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축국과 그네뛰기가 당나라에 이미 청명절의 대표적 운동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청시대에는 조정에서 직접‘청명절’을‘그네절’로 정하기도 했는데 궁인들과 비빈들을 초대해 유희를 즐기며, 봄볕을 만끽하게 했다.

 백성들은 음식을 하늘로 여겼으므로, 선인들은 봄나들이 때 자연스럽게 먹을 것을 가져갔다. <개원천보유사>에는“사녀들은 봄이면 함께 교외로 나들이를 갔다. 가는 길에 예쁜 꽃을 만나면 꽃 앞에 돗자리를 깔고 둘러 앉아 장대를 꽂고, 매듭을 지어, 입고 있던 붉은 치마를 풀어 서로 늘어뜨려 임시방편으로 야연(野宴, 야외에서 하는 식사)의 장막으로 삼았다”고 당나라 사녀들의 봄나들이 피크닉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선인들이 외출할 때는 지금보다 불편했는데 하물며 음식을 가져갔으니… 그래서 총명한 사람들은 묘책을 내기도 했다. <부생육기(浮生六記)>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소성(蘇城)에 남원과 북원 세 곳이 있는데, 유채꽃이 노랗게 물들었을 때, 괴로워도 간단히 한잔 할 술집이 없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길거리에 포(鮑)씨 성을 가진 노점상이 짐을 지고 훈툰을 팔고 있었는데, 돈 100조(吊, 1조=옛날의 화폐 단위로 1000전에 해당됨)로 그를 고용해 같이 가니 뜨거운 음식과 술 모두 먹을 수 있었다.

 선인들 봄나들이도 열풍이 불었다

 인간세계에선 4월이 가장 아름다워 세상이 도원경이다. 봄 나들이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은 늘 고조되었는데, 물론 이것은 고대에도 그러했다.

 <시경·정풍·진유(詩經·鄭風·溱洧)>에는‘진수와 유수는 투명하게 맑기도 하지. 총각과 처녀들 그곳에 가득하구나’라고 춘추시대 정국 봄나들이 성황을 기록하고 있다. 봄볕이 따뜻한 날, 맑은 진수와 유수 가에는 남녀노소가 짝을 지어 봄나들이를 즐겼는데 발 디딜 틈 없고 떠들썩했다.

 당나라에는 봄나들이가 더욱 성했다. 우선 국가가 창도했다. <당시기사(唐詩紀事)>에 따르면, 매년 봄에 황제가 후궁과 비, 조정 대신들을 데리고 배 밭을 거닐고, 위수변으로 가서 유람하고 제사를 지냈다. 또한, 백성들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 전국적‘봄나들이 열풍’이 빠르게 불었다. 이로 인해, 많은 봄나들이 애호가들이 생겨났는데 백거이(白居易)가 바로 그 중 한명이다. 이 위대한 시인은 65세에도 답청을 생각하며 <춘유(春游)>라는 시에서“70살이 되려면 겨우 5번의 봄이 남았다. 봄에 즐기지 않으면 아마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假使得七十,只有五度春. 逢春不游乐,但恐是痴人.).”라고 했다.

 남송(南宋) 시인 주밀(周密)은 <무림구사(武林舊事)>에서 도성 임안(臨安) 사람들이 답청시의 떠들썩한 광경을 묘사했다. 도성에서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녀는 화려하고 귀한 분장을 하며, 강변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유람선에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루 종일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송나라의 유명한 화가 장택단(張擇端)은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로 천고에 이름을 남겼는데, 바로 이 대작은 매우 생동감 있고 생생한 필치로 변경(汴京)과 변하(汴河) 양안의 청명절 때의 풍속세정을 그려냈다. 그림 속에 인물 500여 명, 가축 50여 마리에 달하며, 길에는 사람들로 떠들석하고 수레와 배는 왕래가 끊이지 않아 청명절에 봄나들이의 성황을 나타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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